의로운 호남의 선비(8) 미암 유희춘, 20년 유배 중에도 학문에 정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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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호남의 선비(8) 미암 유희춘, 20년 유배 중에도 학문에 정진하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0.02.2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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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545년에 인종이 승하하고 11살의 명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한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는 밀지를 내려 윤임, 유관 등 대윤 일파를 제거하라고 지시한다. 밀지를 받은 대신들이 모여서 상의하는데, 유희춘·백인걸 등은 부당함을 지적한다. 죄목이 분명하지 않고 밀지에 의해 처리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에 문정왕후는 크게 노한다. 곧바로 유희춘 등은 파직 당한다.

2년 후인 1547년 9월에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부제학 정언각이 봉투에 든 글 한 장을 문정왕후에게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 딸이 남편의 임지를 따라 전라도를 가기에 전송하려고 과천현의 양재역에 갔다가 익명의 벽서를 보았습니다. 이에 봉하여 올립니다.”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윤원형 일파는 이 벽서사건을 이용하여 윤임의 잔당세력과 정적들을 일제히 제거한다.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윤원형을 탄핵한 송인수, 그리고 이약빙을 사사(賜死)시키고,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임형수 등 수십 명을 귀양 보낸다. 그리하여 노수신은 진도로, 유희춘은 제주도로 유배를 간다. 그런데 유희춘의 유배지가 함경도 종성으로 다시 바뀐다. 제주도가 고향인 해남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였다.

미암 유희춘(1513~1577). 그는 해남에서 태어났다. 미암(眉庵)이란 호도 해남읍 금강산에 있는 초승달 같고 미인 눈썹처럼 생긴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아버지 유계린은 금남 최부의 첫째 사위인데, 순천에서 유배 중인 김굉필에게 학문을 익혔다. 최부와 김굉필은 둘 다 1504년 갑자사화로 처형되었고. 미암의 형 유성춘도 기묘사화로 화를 당하였다. 미암도 대를 이어 을사사화의 시련을 겪는다.

삭풍(朔風)이 몰아치는 외진 땅 종성에서도 미암은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육진의 하나인 종성은 되놈으로 불리는 말갈족과 대치하고 있어, 백성들은 말 타고 활 쏘는 무인 기질이 농후하였고 학문과는 아예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그는 종성 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처음에는 지겨워하는 백성들도 차츰 그를 따라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종성에서 그는 속몽구(續蒙求) 4권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모두 암송하고 있는 것을 토대로 하여 지은 것이다.

1565년에 문정왕후가 별세하고 윤원형이 축출당하자 유배 갔던 사림(士林)들은 다시 등용된다. 그러나 유희춘은 그러지 못했다. 충청도 은진으로 유배지가 옮겨지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1567년 7월에 선조가 즉위하자 세상은 달라졌다. 사림들이 중용되었고 사화로 피해를 입은 선비들이 복직되었다. 1567년 10월 선조는 유희춘, 노수신의 복직을 명한다. 20년 만의 복직이었다. 그래도 품계는 예전 그대로였다. 기대승이 나섰다. “20년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을 폐하지 않고 곤궁과 환난 중에도 변절하지 않은 사람은 발탁 기용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이다. 1568년 1월에 선조는 기대승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희춘, 노수신을 특진시킨다.

미나리 한 포기를 캐어서 씻습니다.

다른 곳 아니라 우리 님에게 바치옵나이다.

맛이야 좋지 않습니다마는 다시 씹어 보소서.

이 시조는 1571년에 유희춘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왕명을 받고 내려온 박순과 함께 전주 진안루에서 노닐 때 지은 헌근가이다.

<여씨춘추>의 ‘벼슬에 있지 않는 이가 살찐 미나리를 캐서 임금께 바치고 싶다‘는 구절에 착안하여 살뜰한 연군의 정을 표현하였다.

하기야 미암 입장에서는 그를 총애한 선조에게 무엇이든 못 바치랴.

홍문관 부제학 유희춘은 경연에서 특출하였다. 경전은 모르는 것이 없고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선조는 유희춘의 총명한 암기력을 항상 칭찬했다.

유희춘 하면 무엇보다도 보물 제260호로 지정된 <미암일기>이다. 유희춘은 홍문관 교리로 복직한 1567년 10월1일부터 담양에서 별세하기 이틀 전인 1577년 5월13일까지 11년에 걸쳐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이는 16세기 후기 조선의 정치사와 생활사를 알 수 있는 소중한 기록으로, 최근에는 <미암일기>를 통하여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의 일생이 새롭게 밝혀지기도 했다.

유희춘의 신위는 외조부 최부와 함께 해남 해촌서원과 광주 무양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또한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에는 미암박물관, 모현관, 연계정, 미암 종가와 사당이 있다./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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